미국인으로 부터 듣는 격동의 한국 역사

미국인으로 부터 듣는 격동의 한국 역사

“잭! 네가 살아야 우리도 살수있다.!” 물 밀듯이 내려오는 12만의 중공군과 맞서 싸우는 피 비린내나는 장진호 전투에서, 그가 속한 부대에서 무선기를 수리할줄 알던 유일한 통신병인 그를 보호하던 전우들의 말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한다는 Clarence (Jack) Prince 씨 (89세).  장진호 전투를 회상하는 그의 얼굴은 어두웠다.

미국인 은퇴자 커뮤니티를 통해 한국문화와 한국춤을 소개하던 필자가 Jack Prince씨를 만난것은 우연일까.  그 강의에 그는 부인과 함께 지팡이를 짚고 일찍 나타나 유창한 한국말로 필자를 놀라게 하며, 잠깐 나눈 이야기들에 감동받아  뉴스코리아  추 연경 기자와 함께 다시 찾은 그 부부의 작은 은퇴자 아파트는 한국사람의 집인지 착각을 할 정도로 한국가구와 사진들 그리고 책들이 작은 책장에 빼곡히 꽂혀 있었고,  오래된 이야기들을 펼쳐놓는 프린스씨 부부와 나눈 이야기들은 어린시절 아버지와 함께 오래 된 사진들을 보면서 설명을 듣는듯 했다.

1950년 8월 2일,  위태로운 상황에 놓인 부산에 배치된 첫 미군부대의 해병이었던 그는 그때 나이 22살이었다.  부산에서 부터 장진호 전투까지 그리고 함흥에서 배를 타고 후퇴하여 다시 부산으로, 그리고 인천 상륙작전. 우리가 역사책에서 배웠고 이름도 가물거리는 그 지명들을 그는 일일이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고,  전투지에서 그가 어머니에게 보냈던 그의 편지들을 고이 간직하고 있었던 어머니로 부터 다시 돌려받아 일일이 타이핑으로 기록을 하듯 정리해둔 그의 폴더는 70여년간의 시간에 바래어 노랗게 바삭거리고 있었다.

그는 8개월간의 전투후 미국으로 돌아올수 있었으며, 그후 미국과 한국을 오가며 대학과 대학원을 졸업후 부인과 함께 1957년 장로교회 선교사로 다시 한국에 가서 1983년 떠날때까지 여러 도시에 학교와 병원을 설립하고, 대전의 한남대학에서 수학과 물리학 그리고 그후 숭실대에서 전자공학을 가르쳤으며 부인 Moneta Prince (82세) 씨는 영어를 가르쳤다.  한국에서 태어난 그의 딸과 입양한 둘째딸,  그렇게 한국과 끊을수 없는 인연을 맺고 22세의 청년에서 50대 중년이 될때까지 함께한 한국.  전혀 희망이라곤 찾아볼수 없던 사람들의 얼굴에서 1960년대 후반쯤에서부터 희망을 조금씩 볼수 있었다던 프린스 씨 부부.  격동의 시대에 많은 아픔을 겪은 한국과 함께한 사람들.

젊은 시절을 보냈던 한국이 지금은 이토록 발전한 나라가 된것이 무엇보다도 기쁘고,  그 시대에 교육의 필요성이 얼마나 절실했던가를 말하며, 그때 한국에서 교육에 일조 할수 있어서 기쁘다는 프린스씨 부부로부터 한국과 한국 사람에 대한 진심어린 애정을 느낄수가 있었다. 두시간이 넘도록 나누었던 많은 이야기들을 지면상 상세히 일일이 적을수 없음이 아쉬우며 박인성, 서명숙이라는 한국 이름을 가진 미국인 부부에게 보여줄 앞으로의 한국이 더 자랑스럽기 위해  조금 더 어깨가 무겁다. (2018년10월9일,  글: 이 정희)prince